비물질적 몸들과 무정형의 회화들: 
구지언의 새로 감각한 세계에 관하여



글_박예린


2022년부터 현재까지, 구지언은 전통 제의에 활용되었던 무신도(巫神圖)의 형식을 차용한 〈중성신〉 연작을 통해 젠더와 종,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질문해 왔다. 제의의 수행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샤먼의 형상은 구지언의 회화에서 신과 인간, 성별의 구분을 초월한 트랜스 신체로 변주된다. 화려한 분장을 한 인물들은 성별과 인종을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로, 역동적인 무용의 동작을 펼친다. 사회가 규정한 성별 규범에서 이탈한 드랙 공연자의 몸을 연상시키는 이 형상들은, 신체의 표면이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규율이 교차하는 장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회화에서 신체와 젠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회화적 기반이 되었다.

Ⅰ. 다종적 감각과 혼성적 존재론의 발생지
구지언의 회화는 육체와 젠더의 이분법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적 구도가 만들어 내는 선과 악, 생명과 죽음, 희생과 파괴의 기호들이 뒤엉킨 다종적 감각의 세계로 향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예컨대 2024년 이후 최근의 작업에서, 구지언의 〈팔부중중성신〉 연작은 기존의 <중성신> 연작이 그랬던 것처럼 더이상 인간의 형태를 띤 순수한 신성이자 해방적 신격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팔부중’은 사천왕의 질서 아래 언제든 신으로 호명될 수도, 악귀로 전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들은 신과 부정한 영적 존재,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식물 그 어느 한 쪽으로도 정주하지 않은 채, 경계에 머물며 ‘분류 불가능한 존재자’로 표상된다. 이제 중성신은 더 이상 화면을 지배하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신과 귀신, 인간과 비인간, 식물과 동물이 한데 얽혀드는, 다종적·혼성적 존재론의 발생지로 등장한다.

〈팔부중중성신〉 연작을 지나면서 구지언의 회화는 존재와 세계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으로 진입한다. 중성신은 점차 다양한 동식물, 귀신, 비인간 존재들과 뒤섞이며, 변형된 모습으로 그 존재론적 스펙트럼을 한층 확장한다. 예를 들어, 〈팔부중중성신-폐려다〉에서는 굶주린 귀신인 아귀를 나타내는 신격인 ‘페려다,’ 고사리의 어린순, 대벌레가 교차하면서 신성과 귀물, 동물과 식물, 영적 불길함과 끈질긴 생명력이 한 화면에 충돌한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한 가지 얼굴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들이 공존하고 조응하며 조직된 새로운 생태적·존재론적 질서를 포착할 수 있다.

〈팔부중중성신-비사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비사사’는 전통적으로 피를 빨고 정기를 흡수하는 악귀인 동시에 정령으로 간주되는 팔부중이다. 구지언은 여기에 곰고양이, 쥐를 문 고양이, 단성 생식을 하는 도마뱀, 사과 등 이종의 동식물을 중첩시킨다. 신과 귀, 인간과 비인간, 영물과 동물의 구분은 흐려지고, 비사사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유동적 존재로 자리잡는다. 비사사는 신성과 부정, 포식자와 피식자의 이중성을 가진 채, ‘나 아닌 것’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실존으로 변형된다. 〈팔부중중성신-구반다〉, 〈팔부중중성신-야차〉, 〈팔부중중성신-나찰〉 등에서도 각각 신과 귀신, 인간과 동물, 선과 악, 영적 질서와 혼종적 파괴성이라는 양면적 속성이 부각된다. 이는 곧 중성신이 더 이상 초월적 신격에 머무르지 않고, 다종적이고 비정형적인 생명과 연결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Ⅱ​​​​​​​. 초종적 생태계와 양자적 상상력
이제 구지언의 회화에서 신화적 서사는 서로 다른 종과 존재들이 끊임없이 얽히고 변형되는 관계망 속에서 새롭게 발생한다. 〈자연〉(2024)에서는 이 경향이 한층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자연은 서로가 서로를 관통하며 흡수하는 과정 그 자체로 표현된다. 오징어가 콘도르를 삼키고, 문어와 인간이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히는 장면은 직선적 위계를 지닌 먹이사슬이 아니라 아니라 상호 포식의 생태계적 순환을 보여준다. 포식자와 피식자, 인간과 동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무너지고, 각 존재는 매 순간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생태적 리듬 속에 놓인다. 이 세계는 점차 분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상호감염의 장으로 열린다.

종(種) 간의 위계가 해체된 이 장면에서 회화는 초종적 생태계의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어류와 조류, 영장류가 뒤엉키고, 식물이 귀신의 형상과 교차하는 장면들은 서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구체적 접촉의 순간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신과 인간은 주변 생명들과 동등한 차원에서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관계는 직선적이지 않고, 한 존재가 동시에 여러 상태와 정체, 그리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 걸쳐 존재할 수 있는 양자적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화면 속의 모든 존재는 닫힌 개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 아닌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열어가는 열린 관계로 재현된다.

Ⅲ​​​​​​​. 무정형의 세계: 공기의 장, 감각의 탈물질화
〈팔부중중성신〉과 〈자연〉에서 드러난 초종적 생태계의 리듬은 2025년 이후 구지언의 회화에서 한층 더 탈물질적이고 무정형의 차원으로 증폭된다. 중성신의 존재는 괴석, 나리, 무정형의 형상들과 나란히 놓이며 서로 다른 존재들과 화면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인물 형상과 무정형, 서사와 비형상, 고정성과 유동성이 병치와 교차의 원리로 함께 전개된다. 괴석, 나리, 허물, 무정형은 신격의 서사를 지우지 않고, 그것과 나란히 놓이며 또 다른 층위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신격들의 서사와 무정형의 세계가 따로 또 같이 전개되면서, 구지언의 회화적 세계관은 한층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확장된다. 인간과 ‘중성신’으로 표상되는 인간적 신격은 더 이상 세계를 대표하는 단일한 매개가 아니라, 무정형적 존재들과 함께 중심을 공유하는 하나의 요소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구지언 회화가 인간 중심적 서사를 부분적으로 탈피하며 새로운 감각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흐름의 핵심은 괴석과 나리 도상에 있다. 괴석과 나리는 구지언의 회화에서 단단한 사물이나 특정 식물 개체가 아니라 종종 화면 안에서 흐르고 교차하며, 영혼과 물질의 차원에서 미완의 가능태로 반복적으로 소환된다. 인간의 얼굴이나 신체로 환원되지 않는 이 형상들은, 구체적 실체라기보다 끊임없이 변형되는 관계의 매개로도 작동하는 듯 보인다. 〈나리괴석도〉 연작은 이러한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초기에는 참나리와 바다나리, 괴석을 결합해 유연한 구도를 실험했다면, 2025년의 연작에서는 부전나비, 공생새우, 해마, 수초 등 다양한 생명체가 괴석과 함께 교차한다. 이때 괴석은 더 이상 단단하거나 불변하는 사물이 아니라, 흐르고 감싸며,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유체적 존재로 변모한다. 이 화면에서 중성신은 독립된 중심으로 자리하기보다는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국면으로 위치한다.

〈꿈, 껍질〉과 〈꿈, 무정형〉에서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마귀의 허물(Exoskeleton)은 탈피의 흔적이자 새로운 가능성의 전조로, 생명과 죽음, 고정과 변화 사이의 경계를 드러낸다. 괴석은 더 이상 명명될 수 없는 형상, 즉 언어화할 수 없는 화자의 알레고리로 나타난다. 특히 〈꿈, 무정형〉에서는 괴석이 고체에서 기체로 치환되듯 묘사되며, 결정되지 않은 자아, 분화 이전의 존재 상태, 말 걸 수 없는 타자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파스텔 톤의 매끄러운 여백들로, 화면은 신이 사라진 자리에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기의 장(場)을 만든다. 이로써 구지언은 중성신과 비인간 존재들, 무정형적 존재들이 함께 펼쳐내는 복합적 세계를 통해 한층 더 개방적이고 다성적인 감각의 세계로 나아간다.



무정형의 세계에서, 신성함은 초월적 권위나 대체 불가능한 신격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형상과 무정형, 고정성과 유동성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비롯된다. 서로가 서로를 스치고 감염하며 변화시키는 미지의 역동 속에서 신성함이 다시 그려진다. 따라서 구지언의 작업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위한 신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신과 인물, 무정형적 존재들이 함께 얽히는 관계적 장을 통해, 언제든 새로운 사건과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는 열린 자리를 마련한다. 구지언의 회화가 제시하는 신성함은 작가도 모르는 사이, 중성신이라는 도상의 자리를 넘어서 관계와 변형이 만들어내는 순간적 현현으로 드러나게 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