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서낭당
- 제주현대미술관《2024 New Rising Artist: 부산물》의 구지언 섹션 리뷰 -
글_이문석
어떤 작품은 형식과 주제 의식 사이에 기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의미가 형식에 간신히 붙어있을 때 발생하는 작품의 긴장감은, 표리부동하게 자신의 목적을 거짓 진술하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위화감과 다르다. 그러한 긴장감을 간직한 작품은 형식과 주제 등의 요소들이 작품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업하는 경우가 있다. 구지언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구지언은 젠더 불일치의 문제를 종교화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붉은 벽면의 전시장 양쪽에 걸린 회화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종교적 도상이 자아내는 숭고함이나 원죄 의식이 아닌, 세속의 육신이 제공하는 매력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지언의 작품에서 형식과 주제의 역할과 그 의의에 대하여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표정한 얼굴과 역동적인 포즈, 요란한 색감이 서로 맞물리는 이 작품들은 어떤 해석의 지반 위에 서 있는가?
구지언의 작업은 성별이분법에 대한 작가의 회의감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작가의 대표적인 연작 제목인 ‘중성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제목을 달리 한 다른 작품들도 이 중성신 모티프의 자장 안에서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젠더가 사회적인 성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로 구성된 세계가 작가를 해석의 변두리로 보냈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때 작가는 해석의 변방에서 발견한 것은 드랙(Drag) 문화였다. 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에서 벗어나 복장을 착용하는 남장 여성이나 여장 남성의 모습에서 작가는 자기 해석의 가능성을 찾았다. 화면에 등장하는 신들이 마르면서도 근육이 도드라지는 모습을 하고, 젠더 뉴트럴한 복장과 화려한 분장과 장식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분명한 자리를 자신의 영토로 삼은 구지언의 신들의 주변에는 각종 동물이 함께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이들은 캘리포니아 콘도르, 도마뱀(코모도왕도마뱀 등), 흰개미와 같이 무성 생식하는 동물들이거나 표범상어, 갯민숭달팽이, 물벼룩 등과 같이 단성 생식하는 동물들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자연화된 성별이분법을 배신하는 이 실제 자연들은 그림 속에서 중성신 곁에 남아 신의 존재 이유를 조력한다.
무신도(巫神圖)는 성별이분법을 등진 신들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구지언이 종교화의 형식을 가져온 데에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제의적으로 해소하려고 한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작가는 사회 내부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희생될 만한 존재에게 쏟아낸 뒤 안정을 얻는 과정에서, 희생된 존재에게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는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 제의’(rite sacrificielle)를 끌어온다. 이분화된 성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함과 이를 자연스럽다는 식으로 윤색해 온 희생 제의를 역으로 이용하여 성스러운 존재의 자리에 드랙을 위치시킨 것이다. 특히 이 제의적 형식을 구현할 여러 종교화 양식 중에서 구지언이 채택한 것이 무속신앙의 무신도였음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신도는 보통 세습으로 무속인이 되는 세습무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신병이라고 불리는 종교 체험을 경험한 뒤 무속인이 되는 강신무(降神巫)에서 사용된다. 강신무 계통의 무당이 무속인이 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신이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무신도를 그리는 것은 무당이 나와 관계 맺는 신의 초상을 그려 신병을 통해 만난 신을 지극히 모시기 위함이다. 강신무 계통의 무당은 신의 초상을 마련하고 그 초상을 모실 신당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들은 신의 말을 옮길 뿐 이를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구지언이 무신도의 형태를 빌려왔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자신에게 신병과도 같은 정체성의 재확인 경험을 가져다준 존재들의 초상을 그려낸다는 것일 테다.
이러한 무신도는 캔버스 또는 목재 패널 위에 에어브러쉬로 분사된 안료와 아크릴로 그려진다. 무신도 안에는 보통 화려한 색감의 운무 혹은 불꽃을 배경으로, 형광빛 코스튬의 인물 군상과 동물들이 자리한다. 인물들의 포즈는 퍼포머나 모델 등, 드랙 문화를 전유하는 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세속 인간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에 가깝고 종교화의 도상 특히 무신도의 양식과는 거리가 있다. 구지언은 자신이 선택한 양식의 캐논을 따르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종교 도상이 보장해 주는 숭고함은 크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듯싶다. 무신도 안의 신들이 입는 복식과 자세, 소품, 표정 등은 작가에게 있어서 전유의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의 형상이 개별적으로 그려졌다는 점, 화려한 채색 등에서 종교화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무신도의 양식과 친연성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드랙 퍼포머들의 모습 그 자체에 더 가깝다.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한 거리감이란 바로 이런 부류의 것이다. 작품의 내적인 논리, 감각의 논리가 와해한 것이 아니라면, 구지언의 작업에서 드랙 퍼포머의 모습이 거의 곧이곧대로 그려진 뒤 이것이 무신도의 형식이라고 지칭되는 상황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구지언이 무신도를 차용한 목적은 과연 다른 종교화 양식에서 기대하듯이 자신의 작업에 종교적 권위를 덧씌우기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구지언의 작업은 종교적 권위가 어디서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종교적 권위가 있는 자리란 어떤 것이냐는 데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성신〉 시리즈를 포함한 구지언의 무신도는 종교화라기보다, 종교 체험이 일어나는 장소를 연출하는 하나의 요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속신앙의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작가 자신이 경험한 정체성의 갈등과 그것의 해소에 대한 바람을 종교적 권위로 덧씌워 해결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이 평면 매체로 선보여지지만, 구지언은 일전에 한 전시에서 설치 작품의 일환으로 신단(神壇)을 조성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신단 앞에 기도하는 존재들도 그려 넣었다. 이번 전시에서 양 벽면 사이에 있는 설치 작업 〈기도하는 사람들〉(2024)이 바로 그것이다. 무신도를 통해 신을 재현하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고, 다시 그 앞에 신자들을 두는 이러한 공간적인 구성으로부터, 우리는 구지언이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권위를 만드는 ‘자리’일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붉은 벽면의 전시장 안에서 작가가 의도한 것은 숭고의 재현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 어떤 장소에서 작동하는지 보기 위한 연출한 장인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지언의 작업은 젠더 트러블이라는 자기 고백적 주제를 내세운다. 이 주제는 화보집 속 모델들과 동식물 도감 속 생명체들의 조합으로 드러난다. 이 재현은 다시 종교화라는 설정 안에 들어가 자신의 정체성 이슈를 희생 제의로 만들 수 있을지 실험한다. 즉, 작품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자기 자리에서 종교적 장소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협업하는 지반을 만드는 것이다. 붉은 공간 속 작업이 안팎으로 긴장감과 거리감을 주는 것은, 성별이분법적 세계관과의 관계 맺기를 위해 한 독실한 무신론자가 연출한 서낭당으로부터 나오는 감각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