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그리는 사람의 우화1)
- 《탈리신화》전시리뷰 -



글_김민선


1.
쓰이지 않고, 읽히지 못한 신(神) 있다. 그래서 그 신은 쓰이지 못하고, 읽히지 않는 증상에 깃들었다. 터져나오는 기침처럼 막을 수 없는 날카로운 외침이나, 발작을 일으키며 휘어지는 허리, 한껏 찡그린 눈썹으로 완성된 가면 같은 표정과 높은 톤의 목소리. 이 같은 증상은 미신, 공주병, 연극성 성격장애를 통칭하여 히스테리(hysteria)라 불린다.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모든 증상을 싸잡아 버린 이름이다. 히스테리는 여성의 몸에서 발병한 질병을 가리키는 전문적인―의학적, 심리학적―용어로 등장해 지금은 비합리적이고 변덕스러운 것들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이 글은 ‘쓰이지 않고 읽히지 못한’ 신이 무의식과 심리학 연구를 진척시킨 주요 기제이지만 쓸모없는 기능인 히스테리에 깃들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히스테리로부터 저항의 힘을 찾은 이들의 표현과 논리를 빌려와 가정을 검토한다.
이들은 학자, 시인, 화가이자 여성/퀴어들로 히스테리의 강렬한 증상들이 어떻게 ‘정상성’에 저항하고 관습적인 합의와 체계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는지 주목한다.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Christina von Braun)은 히스테리를 정신분석학의 진단 용어가 아닌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하여 로고스-문자-이성의 유토피아가 일으킨 집단적 기억상실을 저지하는 개념으로 히스테리를 제안한다.2) 그에 따르면 로고스는 문자는 필멸하는 존재를 삭제하는 무기로 작동했다. 유한한 몸과 무한한 정신을 구별하고, 인간이 생식기관에서 태어나 죽어 썩는 존재임을 잊게 했다. 이 같은 기억상실은 생식기능과 재생산, 죽음의 순환으로 지속되었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문자로 쓰인 관념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필멸하는 몸을 잃고 탈신체화된 성(性)은 추상화되어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젠더 질서로 수행된다. 신은 공동체의 상상과 원동력이 아닌 문자를 쓸 수 있는 로고스의 자식들에 의해 교리로 기록됐다. 추상적인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어머니와 아버지, 지식과 규칙을 서술하는 문자를 기반으로 이미지가 생성되었고, 실재하는 육체가 이미지를 따르며 추상은 물질로 재현됐다. 로고스는 순탄하게 세상을 추상화하고 다시 물질화했다. 그렇게 구체적인 이념을 행하는 법전과 이데올로기, 젠더를 수행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세상에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로고스가 예측 불가능한 증상이 등장했으니, 그게 바로 히스테리이다.
히스테리는 자궁이 머리로 가 일으킨 병이란 오명에서 시작하여 억압된 무의식의 논의까지 이끌어내며 문자와 기나긴 역사를 함께 했다. 히스테리는 변화무쌍한 증상들로 등장해 왔는데, 그 증상들 사이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것’을 병적인 것으로 진단 내리게 한다는 점이다. 히스테리는 정상성으로 용인되는 경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정상적인 상태가 가진 모순을 드러냈다. ‘성모의 무염수태(無染受胎)’를 본받아 일으킨 불감증,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여성을 따라한 연극적인 몸가짐과 말투, 시각・청각・후각의 부분적인 상실, 혹은 마비로 ‘지워지는 필멸적인 육체’ 등 히스테리의 증상들은 로고스의 이상을 병리화 한다. 이 글에서 묘사하지 못한 수많은 증상이 히스테리라는 병명으로 진단되면서 로고스의 모순이 드러나고, 모든 개념이 추상과 실재로 나뉘어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추상적 사유가 자신을 앞세우고 그 뒤로는 억압한 몸, 감각, 언어의 존재감이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증상으로 현현한다. 하지만 로고스는 실재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 새로운 감각적 실재3)를 생산하며 자신의 역사를 계속 세워나갔다. 인간의 생식기능을 대체한 유전공학은 무염수태를 위한 기술을 개발했으며, 여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공육체를 가진 인공여자가 되었다. 거칠고 강렬한 육체적 증상이 도리어 로고스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하는 격이 되면서 히스테리는 전략을 바꿔야 했다. 실재하는 육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써 왔던 히스테리는 그동안 보전해온 (인공)육체를 거짓이라고 고발해야 했다. 이즈음에서 나는 브라운에 이어 앞서 초대한 ‘이들’ 가운데 신을 그리는 구지언을 소개한다. 작가는 실재와 증상을 모두 부정하게 된 히스테리에 망각된 공동체의 기억과 가장 가까운 신이 깃들게 함으로써 히스테리가 가진 저항의 힘을 이어가고 있다

2.
구지언의 <중성신中性神>(2022~현재) 연작은 화려한 색, 뚜렷한 아웃라인과 정밀한 묘사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160cm의 6등신으로 딱 떨어지는 신체, 예리한 턱선과 자잘하게 붙은 근육, 매끄러운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로 그려진 인물이 화면 중앙에 서 있다. 인공감미료를 잔뜩 넣은 사탕 같은 색으로 꼼꼼하게 칠해진 작품은 매끄럽게 마감되었다. 비체적인 신체에서 비롯된 미적(aesthetic) 반응보다 풍성한 색채가 가진 미(beauty)에 대한 감흥을 먼저 일으키는 그림이다. 여성/퀴어 예술가들의 공격적인 전략인 비체(abject)가 주는 즉각적인 혐오와 괴물적인 것에 대한 쾌락에 익숙한 감상자에게 부적절한 찝찝함을 안긴다. 흘러넘치고, 뭉개진 신체, 거칠고 거침없는 붓질, 벌어진 구멍에서 질척이며 흐르는 분비물이 아웃라인을 찢고 나와 표준적 주체와 정상성을 파훼하는 선언 같은 작업들과 달리, 구지언의 작품은 아웃라인을 다시 정교하게 잡고 열심히 만든 거푸집에 알록달록한 설탕물을 부어 주조하듯 인물을 그렸다.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감각을 자극하며 여성/퀴어의 존재방식과 결합하는 전략의 비체시된 신체 그리기 전략과 달리, 구지언은 단련되고 꾸며진, 히스테릭한 (인공) 육체에 중성신을 현현하는 전략을 취한다. 경직된 육체의 표현은 <성형성을 가진 하얀 막>(2021)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여성기를 본떠 만든 하얀 막은 덧난 상처 위에 굳어진 흉터처럼 벽에서 돋아났다. 폰타나와 같은 거장들이 하얀 캔버스나 하얀 벽에 깔끔하게 상처를 내어 일으킨 물리적 변화가 결국 이념에 이념을 더한 장치라면, 구지언은 벽에 상처를 내어 이념을 덜어내고 원형이 있는 실재의 흔적이자 누락된 육체의 징후를 새살처럼 자라나게 했다. 본래의 살결, 축축함, 냄새를 잃고 벽만큼이나 단단해진 여성기의 히스테리는 도려낸 나비의 날개가 더해지며 더 과장된다. 나비의 날개는 인공여성기를 아름답게 꾸미어 여성성을 희화하는 연극적인 장치이면서, 여성기를 석화하는 벽(석녀)의 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비는 (인공) 여성과 함께 죽어버렸고, 벽 위로 솟아오른 견고한 육체에 덧입혀진 이중성―여성성/여성 아님―이 충돌을 일으키며 둘 모두의 거짓됨이 밝혀진다. 감출 수 없는 건 모형을 뜨기 위해 질척이는 석고가 닿았던 여성기의 움찔거림, 긴장감, 살아있는 육체에서 나타난 활력 징후의 흔적이다. 구지언은 단단하고 완결되어 완벽함을 위장하고 있는 육체에서 히스테리가 가리키는, 지워진 신체의 감각을 찾게 한다. 나비의 잘린 날개는 중성신 연작의 첫 작품 <운조의 중성신>(2022)에서 다시 자라났다. 제목에서 ‘중성신’이라 쓰인 신의 모습은 교리/문자가 제시한 표상에 따라 그려지는 종교화처럼 규격화된 화면에 나타났다. 규범을 따르는 순종적인 태도에 속은 감상자들은 익숙한 듯 낯선 신체에서 규정적인 중성의 증거를 읽어내려 한다. 여성과 남성이 아닌 것, 나의 몸과 다른 몸의 지도를 그려보는 시도는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혼종적인 신체와 화려하지만 무의미하게 읽히는 종교적 도상에 의해서 번번이 미끄러진다. 구지언의 중성신은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된 몸과 비규범적인 몸의 이미지를 실천적 전략으로 삼아 젠더 질서를 과장하여 꾸며내는 드랙(drag) 퍼포머의 공연 사진들을 혼합하는 스케치 과정을 거쳐 그려진다. 성과 젠더에 관한 타율적 규정을 무효로 하는 스케치 위로, 사탕발림처럼 진화적이고 사이버틱한 위장을 더한 중성신의 몸은 관념적인 성의 존재론적 부재를 강조한다.
구지언의 히스테릭한 전략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담론에 그쳐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기호화된 성들을 화려하게 꾸며 무대 위로 올리는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 성부, 성모, 성자 등 종교와 결부하여 기호화된 성들은 교리-기록-문자 밖의 사례들에 의해 패러디 된다. 단성생식으로 알을 낳은 캘리포니아 콘도르, 무성생식을 하는 튤립, 갯민숭달팽이, 나리꽃과 지렁이 등 실재하는 생식 사례를 경유해 다양한 성을 가진 생물들이 도상으로 등장하여 종교적 알레고리를 해체한다. 정성스럽게 그린 도상에서 원본과 모방 사이의 위계는 사라지고, 기호화된 성은 실재하는 성으로 분화하여 새로운 젠더 창조를 실행에 옮긴다.

3.
히스테리는 딸과 어머니를 연결하는 병으로도 읽혔다. 어머니에게서 나타난 히스테리 증상이 딸의 히스테리에서도 고스란히 등장하거나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발화하였던 억압된 기억은 딸의 몸에서도 발화되었다. 딸은 그렇게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바리와 할망의 기억을 가진 몸으로서 히스테리를 실천한다.

“바리는 아버지가 없는 곳, 공동체의 명령이 미치지 않는 비밀의 영역에서 자못 행복하다. 그러나 이미지의 소환과 유지를 통해 소명을 환기하며 이쪽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억이 이미지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기억을 환기하게 되었다.”4)

김혜순 시인의 시론에서 여성시의 화자는 감성적 주체로서 ‘공동체의 죽음과 생명을 운반하는 소명과 의지가 숨어서 숨 쉬는’ 이미지를 기른다.5) 구지언의 그림은 소명을 환기하는가? <중성신>은 억압된 기억, 기록되지 않은 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신화적 사유를 환기한다. 작가는 만신이 그의 입을 통해 몸주신의 말을 전하고, 신의 외형을 묘사하여 그려지는 무속도의 형식을 차용해 신화적 시대에 일어난 행위를 모방하고 신화적 삶의 맥을 이어간다. 신체와 감각의 일부로 경험되는 구술 언어로 묶인 사람들이 할망신의 창조성에 기대어 공동체를 이루었던 신화적 시대를 현시한다. 할망신의 자손들, 히스테리의 후예들은 <하늘과 땅의 우화>(2023)에서 실존하는 실재의 차이를 유영하며 함께 춤을 추는 축제를 연다. <중성신>의 몸에서 하나로 겹쳐졌던 여러 층위의 몸들은 가로 5미터로 넓게 뻗은 천 위에 흩어져 제각기 포즈를 취한다.

모름지기 성공한 삶이란
적응력이 좋고,
기회를 잘 타고,
끈질기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씨를 많이 퍼뜨린다.
이 점을 이해해라.
이용하라.
하느님의 모습을 빚어라.6)

위와 같은 시를 쓴 시인7)은 훗날 그가 찾은 터전에서 “우린 여기에 공동체를 세울 수 있어요”8)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신의 모습을 직접 빚는 자와 같이 신을 그리는 자의 우화에서는 실존하는 몸의 기억을 되찾아 서로 연결된 자들이 이룬 상상의 공동체가 등장한다. 비체시된 몸들과 신격화된 미천한 존재들, 위장과 변신을 거듭한 이들이 연대와 화합을 이룬다. 찢어지고, 제 몸에서 떨어져 방황하던 나비의 날개는 제자리를 찾아 힘껏 활개 친다. 작가는 2023년 진행한 개인전 《탈리신화》에서 그동안 사이보그, 포스트 휴먼과 괴물로 호명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중성신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중성신의 신당에 입장하기 위해 관객은 입구에서 스스로의 육체를 지우고 신기(神器)를 걸치는 의례를 치렀다.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거울에 관객의 몸은 비춰지지 않고, <초자아-흰개미>(2022)의 가면만이 띄워져 있었다. 이처럼 구지언이 그리는 신(화)은 과거의 기억을 가장 현재적이고, 어쩌면 미래적이라 읽히는 육체와 얽히게 한다. 이 히스테릭한 전략은 ‘몸의 해방’을 향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게 한다. 인공지능, 유전공학,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인공) 신화가 자신하는 해방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구지언의 작품은 뚜렷한 내러티브를 가진 몸의 묘사와 비규범적인 창조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문자로부터 봉인 해제된 공동체를 향한 이미지와 우화를 그린다.


1) 본 글의 제목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저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의 제목을 오마주 하였다.
2)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히스테리』, 엄양순·윤명순 역(서울: 여이연, 2003).
3)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같은 책, p.18.
4) 김혜순, 『여성, 시 하다』(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7), p.34.
5) 김혜순, 같은 책, p.35.
6) 옥티비아 버틀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장성주 역(파주: 비채, 2022), p.46.
7) 옥티비아 버틀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의 주인공.
8) 옥티비아 버틀러, 같은 책, p.567.